E 2010. 3. 27. 21:57

나는 누구인가?

Source : Cwep@Flickr


나는 누구인가? - 3월 생각노트에서 발췌.


고인들이 말한다. 너 자신을 알라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먼저 필요한 것은 자본과 기술이었던가? 그들은 아니라고 말한다. 적어도 선지자들은 자신에 대한 파악을 더 중히 여겼다.

나를 적음으로써 그것에 대해 서약을 하고 되돌아보았을 때의 모습과 비교할 때, 자신의 깊은 상처에 빠지고 고민의 수렁에 두려 있는 경우 자신만이 돌아보고 고칠 수 있다는 것을 가정으로 두자. 그 경우 이것은 나치 사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인 과정에서 무언의 압력을 가했던 나치는 결국 단 수년 만에 독일을 부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나치는 더 나아가 차별과 프로파간다에 빠져 허우적거렸고 결국 사라졌지만 우리는 경험자의 실수를 반복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자신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면 된다. 하나둘씩 떠올리고 내면을 대하면 보완되고 발전한다.


한국 교육에서는 이런 중요한 것이 반영되어있지 않다. 사람들은 각각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나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명문대 위주의 교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생각해볼 기회조차 없어 - 어쩌면 생각을 하더라도 - 그걸 개발키 힘든 것이 현실이다. 교사 집단조차 미술이 특기인 학생들에게 위로 한 줌과 함께 "이제 공부해야지."라고 비수 하나를 같이 던지게 된 것은 개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다. 당연히 사회 구조에 뿌리가 닿아있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말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특기를 발달시키는 것은 정말 어렵다. "이제 공부해야지."가 의미하는 바는 다른 형태로도 특정한 습관이 되고 관습이 될 수 있다. 이걸 헤쳐나가야 새로운 토대 아래 흥미로운 교육이라는 걸 경험케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현실에 적응하라."며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는 기본 섭리를 가볍게 무시한다. 무조건 높은 곳만 보고 아픈 몸으로 달리는 걸 보면 한심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이런 중요한 시기에 공모 교육감은 특급 비리를 시종일관 터뜨려대며 교육을 우습게 보고 있다. 깔깔.

현실 적응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당신은 기득권이다. 당신은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 애써 무시하며 항변하는 사람일 수 있다. 가난이 대물림되듯 흥미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현 교육도 언제까지 되풀이될지 알 수 없다. 한 줄기 희망이 어느 동네에 비친다 하더라도 빛을 덮으려는 쥐새끼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 글도 그 연장선이다. 만약 글에 흥미를 느끼라는 목적으로 쓰라고 했다면 - 인권을 무시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았다면 - 그게 속박의 첫 끈이 풀릴 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난 반항하지 않겠지만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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