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2012. 3. 9. 22:41

국방의 의무

한국 남자들에겐 특정 나이가 되면 입영 통지서가 날아온다. 이건 거부할 수 있지 않으며 거부할 경우 대신 그 기간을 감옥에서 산다. 이때 종교적, 사상적 이유가 있어 거부하는 자들을[각주:1]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라고 칭한다. 이들이 원대한 양심이 있어서 거부한다기보단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정의를 관철했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일지도. 아무튼,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자 뿐이다. 왜냐하면, 여자에겐 입영 통지서가 찾아오지 않으니깐.

간단히 루소를 생각하자. 사람들은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 국민은 법과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세금을 내는 등 의무를 진다. 한국의 경우 4대 의무로 대표되는데 가장 언급이 많이 되는 네 가지만 나열한 것이다. 납세의 의무, 노동의 의무, 교육의 의무, 국방의 의무가 바로 그것이 되는데, 이런 의무를 지키는 대신 각종 권리와 자유를 누린다. 물론 국가 안에서 태어난 이상 법 테두리 안에서 국가와의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상당히 어려울 것은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상당히 불평등하다.

의무를 강제하지만 기본권을 지켜줄 마음이 없는 정부 하에서 이런 상황은 더 심각하다. 대부분의 나라에선 부카니스탄처럼 마구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표면과 속이 다른 행보를 보인다. 이것은 헤게모니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가 없으며 그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며 지배할 때 예전의 방식보다 훨씬 효율적이기도 하다. 마치 선거 전 공약을 남발하고선 지키지 않는 현상이 반복되었을 때 신뢰도가 저조한 현상이 다른 후보에게도 똑같이 영향을 미치듯 연속된다.

한국은 상당히 복잡한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유교 사상이 깊게 내재되어 있으며 남아선호 사상의 잔재 역시 이곳저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각주:2] 즉, 이런 사회에서 기본적으로 남성의 권리가 더 많은 건 뻔한 사실이 틀림없다. 정확하게는 여성의 권리가 더 적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 침해는 모두 남성 주도적인 사회에서 발생한다. 그 결과 가정은 가부장제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사회는 고착화된 상태에서 머문다.

놀라운 점은 남성과 여성 모두 평등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여성의 신체적 '다름'에 의해 발생한 어쩔 수 없는 권리들이 존재하고 그와 비슷한 혜택을 남성에서 요구하는 것이다. 남성들에 미안하지만 이것은 차별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이 예시는 물로 볼 정도로 갖가지 논점에서 남성과 여성이 차별인지 아닌지 열심히 대립하고 있다. 여성가족부의 존재가 꽤 많은 영향을 줬지만 대부분은 사실이 아니고 여성부의 폐지는 말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다. 특히나 가치관의 기저가 남성 우월적인 면이 덮고 있는 한국에선 더욱.

그와는 별개로 혹자는 한국 여성들이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는 반 이상 틀린 말이다. 그냥 간단히 전쟁 유사시 여성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역할이 효율적인지 생각해보라. 한국 여성들은 국방의 의무를 진다. 다만 병역의 의무에서 미묘한 감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국 여성들을 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분명 법은 잘못되어 있고 남성들에게 보내지는 입영 통지서에 비할 책임은 여성에게 요구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미친 나라는 포퓰리즘은 까대면서 표를 의식해 어느 쪽에서도 대체 법안을 발의하지 않는다.[각주:3] 국방세라고 생각만 툭 던져놓은 게 있긴 하다만 이게 실현되려면 군대 내의 강압적인 문화부터 바뀌어야 하며 이 부담은 얼마든지 전가 가능하단 점에서 쓸모없다. 이외 군 가산점이라고 수준급 호구 대책도 있다. 공무원 시험 때 혜택을 주는 것인데 이게 확대되어서 민영 기업에서 시행한다고 하자. 그럼 프리터들은? 외국 기업들은? 그 기업이 왜 그런 의무를 지녀야 하는가? ActiveX는 버리기 싫고 보안은 필요하니까 돌려막기 하는 것은 사회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모양이다.

군가산점 같은 이상한 게 나오고 후속 대처가 없는 이유는 정부 세수 부족이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다. 최저임금이나 대체복무제가 조용한 원인도 같다. 군 복무 문제와 양성평등은 같이 끌어들여선 안되는 문제지만 엮이지 않을 수가 없다. 서로 꼬이지 않으려면 역시 효율성은 무시하더라도 여성도 강제되는 게 좋을까.

모든 사건이 터질 때마다 멍청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가장 크다. 여기에 임신을 끌어들일 이유는 없다. 국가 입장에선 국방과 출산율 모두 중요하지만, 개인 입장에선 강제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극명하다. 그리고 남성연대라는 수준 이하의 단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논리 또한 마찬가지다. 양쪽에서 병신 짓을 하니 사람들이 점점 생각하지 않고 의견을 개진하는 것 같다. 아래 예시를 든다.


유사 멍청이들이 너무 많으니 조심하자. 여성부가 如성부가 되길 바란다면 남성들은 여성들의 권리 축소 운동을 하지 말고 남성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잘못된 법에 항의해라. 하지만 어느 나라에 쓸데없이 긴 기간을 군대에 박혀 쓰레기 같은 문화를 견디고 노예랑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는 제도가 있나? 이런 노예제도에 대한 사회적인 목소리가 없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하다. 물론 사회 입장에선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2014년 03월 9일, 글에 아래를 더함.


놀랍게도 위 글을 쓴 뒤 딱 2년이 지나 헌재의 판결이 있었다. 다시 헌재가 남성에게만 병역을 부과하는 것이 옳다고 판결을 내렸다. 다수결로 결정되는 헌재의 특성에 따라 일부가 비합리적이라고 평하고 싶지만 놀랍게도 만장일치다.

헌법재판소가 내놓은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남성이 전투에 더 적합한 신체적 능력을 갖추고 있다.
2. 신체적 능력이 뛰어난 여성도 생리적 특성이나 임신과 출산 등으로 훈련과 전투 관련 업무에 장애가 있을 수 있다.
3. 징병제가 있는 70여 개 국가 중 여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곳은 극히 일부이다.
4. 남성 중심의 현 군 조직에선 성희롱 등 범죄나 기강해이에 대해 우려가 있다.


아무리 봐도 관료주의에 귀차니즘으로 도배된 것 같다. 더불어 평등권 운운하면서 자신들이 더욱 남녀차별을 조장하고 있다. 이런 판결이 전원 일치 합헌 결정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다.

1번부터 의문을 달아보자. 현대전이 전투만 하는 것이었나? 보병으로 시작해서 각종 전투병이 있고, 취사병 등 수많은 비전투병과로 종류는 차고 넘친다. 신체적 능력의 우열로 병역을 논하는 것이 옳은가? 여성 ROTC 등 장교와 부사관도 존재하는 와중에 이런 근거는 개소리의 극단성으로 치닫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여군 위헌이라고 하세요. 더불어 신체적 능력이 가장 주요한 요소라면 장애를 가진 남성은 공익으로 빼지 말고 면제를 시켰어야지.

2번은 자기가 제 무덤 파는 꼴이다. 장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므로 이것이 의무와 동일시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또한, 여기서 '있는 제도 그대로 쓰면 되지, 뭘 굳이 바꿔야 해?'라는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여성 군인의 전투 효율 대비 비용을 생각하면 필요하지 않다는 무진장 경제학적인 사고방식이다.

3번, 만약 여성에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곳이 극히 일부더라도 그를 근거로 일반화할 수 없다. 그리고 과연 극히 일부인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처럼 무조건적으로 남자를 잡아다 검사시키고 대부분 입영시키는 경우는 또한 극히 일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다른 나라와 똑같이 볼 수 없다는 점이다.

4번, 가부장제가 가정에서 사회에서도 만연한 지금 여성은 회사도 가지 말라는 소리로 보인다. 놀라운 군대문화와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가 섞여 가는 곳마다 수직적 관계로 도배되어 있고 여성들의 간부급에서 사회참여율이 낮은 것3을 생각해보면 이 근거는 각종 기업에서 여성 인력을 배제하라는 말을 여성 친화적으로 속삭여준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어제 글을 써뒀던 것인데 갑자기 오늘 판결이 갑툭튀하여 매우 놀랐다.[각주:4] 그리고 판결의 내용에도, 결정에도, 전원 일치라는 기이한 결정에도 모두 놀랐다. 이게 위헌이 되어야 하는 것은 기본권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다른 제도적 완화장치를 만들기 위해서도 필수 불가결이다. 그러니까 남성만 착취당하는 이 모순적인 징병제에 대한 대대적인 개선이 있어야 한단 말이다.

또한 "왜 남자'만'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하는가?"보단 "왜 남자'가'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하는가?"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것을 알린다. 여군 사병이 생기고 강제되는 움직임이 있다면 이 불합리한 사회에선 바랄 수 있는 것도 다채로워진다. 급료와 인프라 그리고 군대문화(-_-)도 개선 여지를 남긴다. 효율성 제고를 위해 각자의 복무 기간이 단축될 것이다. 이게 아니더라도 다른 제도적 보완을 하려면 좀 해주든가.

나는 여군 사병이 생기는 것 자체엔 의견을 유보한다. 하지만 국방에 관한 깊은 논의는 국가가 원할 때에만 논쟁이 일어났다 결국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사라지고 만다. 군내 처우 개선은 아직이고 그 문화는 도저히 바뀔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물론 임금도 마찬가지고. 이런 불합리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이 분야에 대한 내용이 좀 더 공론화되었으면.


  1. 이것이 비양심적인지 양심적인지에 대한 가치판단의 답은 미루도록 하자. [본문으로]
  2. 여전히 셋째 이상의 아이의 경우 출산 성비가 치우친다. [본문으로]
  3. 사실 현 제도가 가장 돈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그래서 그냥 이 글에 덧붙였다. 놀라운 우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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